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정치개혁은 추첨제로

opengirok 2011. 12. 8. 10:22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변호사)

스위스에는 파워포인트에 반대하는 당이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정당이다. 파워포인트 작성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스위스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므로 파워포인트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정당은 2011년 10월 18일 현재 2702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다(www.anti-powerpoint-party.com/en).

뭐 이런 정당이 다 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정당이 존재할 수 없다.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요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5개 이상 시·도에서 각각 10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정당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식으로 정당 설립을 까다롭게 정해놓은 나라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정당정치가 발달한 독일 같은 경우에는 이런 숫자 제한이 없다. 정당은 꾸준히 선거에 후보를 내고 정치적 활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우리나라는 교사, 공무원들의 정당 가입과 정치활동을 금지해놓았다. 그러나 교사와 공무원들이 자아가 없는 것도 아닌데 정당 가입이나 정치활동 자체를 막아놓은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업무와 관련해서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사나 공무원이 얼마나 되겠는가? 필요하다면 교사가 교실에서는 특정 정당을 위한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공무원은 자기 업무와 관련해서 정치활동을 못하게 하면 될 일이다.

웃기는 것은 교사는 안 되는데 교수는 정당 가입이 된다는 사실이다. 말단 공무원은 안 되는데, 대통령은 정당 가입이 된다는 것이다. 교사가 아직 성숙단계에 있는 초·중등학생을 가르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겠지만, 수학교사가 수학시간에 정당이나 정치에 대해 가르치는 것도 아닌데 개인의 정치적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은 설명이 안 된다.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선거제도의 문제가 있다. 지금처럼 지역구에서 1등만을 뽑는 소선거구제도는 가장 나쁜 선거제도이다. 소수파 유권자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등이 33%를 얻어 당선된다면 나머지 67%의 유권자들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례대표제가 소선거구제에 비해 장점이 많은 제도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일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 있지만, 지역구에서 뽑히는 국회의원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이다. 학계나 시민단체들이 비례대표제 확대를 주장하지만, 정작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

이처럼 잘못된 정치의 룰이 정치판을 지배하고 있다. 내년에 총선과 대선이 있지만, 이런 정치관계법의 독소조항에 대해서는 논의가 없다. 국회의원들에게 정치관계법 개정을 맡겨 놓으면 기득권을 가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고치려고 할 뿐이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서는 시민들 중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160여명을 뽑아서 이들에게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초안 작성의 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로 불렸다. 시민의회에서 작성한 초안의 내용을 그대로 주민투표에 부쳐 확정하기로 했다.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은 시민의 입장에서 선거제도 개혁안을 작성했고, 그 결과 비례대표성을 확대한 선거제도 개혁안을 만들었다.

사실 추첨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데 유용한 장치다. 특히 선거로 뽑힌 국회의원들에게 맡기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추첨제를 쓸 수 있다. 정치제도 개혁이 그런 문제다. 우리도 추첨제로 뽑힌 시민들이 정치제도 개혁안을 만들게 하는 ‘정치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의회 구성법’ 같은 것을 총선 후보자들에게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으면 정치개혁은 공염불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