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세상에서 가장 경쾌했던 저항의 기록 <파티51>

opengirok 2014. 12. 12. 17:45



철거되는 두리반을 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받(사진: 51+필름)


영화는 칼국수 집 두리반이 있던 건물이 철거되며 시작된다. 마지막 남았던 건물 한 채가 푸석푸석하게 부서지는 모습을 세 음악가가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다. 한받은 기타를 치며 “아~ 두리반~ 두리반~”을 연거푸 부르짖고 박다함은 먹먹한 마음에 철거현장 주변을 서성인다. 하헌진은 “오늘은 있었는데 내일은 없잖아요”라고 내뱉고는 이내 울먹인다. 이 탄식 한 마디에 재개발이라는 말의 기만과 폭력성이 명확해진다. ‘토지나 자원을 다시금 유용(有用)하게’ 한다는 의미의 재개발은 현재 존재하는 것의 소멸이 전제가 된다. 무용(無用)한 것이 소멸되고 유용한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유용과 무용의 기준은 뭘까? 누가 유용과 무용을 결정할까? 그러면 그들은 유용한가? 또 우리는 무용한가?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건물. 경찰이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했다(사진: 오마이뉴스 권우성)


<파티 51>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잠시 2009년의 상황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재개발에 저항하기 위해 전기마저 끊긴 채로 반 폐허가 된 건물을 점거해 농성하는 것은 결코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다. 재개발은 오랜(특히 서울과 수도권의) 사회적인 문제였지만 저항은 주로 철거민 당사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2009년은 무거운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2009년을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로 시작했다. 그리고 용산참사는 극단적인 경우에 저항의 결말이 어느 정도까지 끔찍한 지경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용산참사로 인해 재개발의 모순과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시 환기되고 보편화 된 것이다.


용산의 슬픔과 공포가 채 가시지도 않았던 2009년 연말. 홍대 앞 두리반에서는 용산과 전혀 다른 방식의 철거 저항이 홍대 앞에서 시작 되었다. 두리반은 당시에 홍대입구역에서 동교동 삼거리 방향(현재 홍대입구역 4번출구 앞 대로변)에 위치한 칼국수 집이었다. 사장인 안종려와 그녀의 남편인 소설가 유채림이 전재산 8500 만원 가량과 대출금 2500 만원 가량을 합쳐 겨우 임대해 마련한 공간 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생계의 터전이 마련된 지 2년 만에 홍대입구역에 공항철도가 들어선다는 이유로 두리반은 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공사를 맡은 GS건설과 철거 시행사 남전디앤씨가 그들 부부에게 내민 보상금은 이사비용 300 만원 가량이 전부였다.


터무니없는 보상금과 강제철거라는 벼랑 끝에서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안종려 유채림 부부는 결국 두리반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용산 남일당 건물과 같은 처절한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를 두리반. 이런 두리반에 어느 날 한받, 밤섬해적단, 박다함, 회기동 단편선, 하헌진 등의 음악가들이 찾아온다. 이들 음악가와 밴드들이 두리반 농성에 합류하면서 두리반은 처절함과 비장한 저항이 아닌 경쾌한 저항의 장이 된다. 정용택 감독은 이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두리반에 모여든 음악가와 주인 부부, 그들의 경쾌한 저항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밤섬해적단의 두리반 공연.  풍자와 조롱이 가득한 밤섬해적단의 공연은 두리반을 찾는 이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사진: 51+필름)


두리반에 모인 음악가와 밴드들은 강제철거 위기 속에서 두리반에서 라이브 공연을 시작했다. 두리반의 공연들이 곧 점거였고 농성수단은 음악이었다. 주말을 중심으로 매주 공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폭염 속에서 단전까지 되는 악조건에서도 공연은 멈추지 않았다. 두리반은 재개발이라는 보편적인 사회문제 외에도 자립음악가들이 펼치는 실험적이고 재치와 조롱이 가득한 공연들을 펼쳤고 이런 두리반만의 매력은 온 사회의 기대와 관심을 집중시켰다. 급기야 이들 음악가들은 2010년 5월 1일 노동절 120주년을 맞아 두리반에서 60 밴드가 넘게 공연한 ‘뉴타운컬쳐파티 51+’를 개최하고 여기에는 공식적으로 2500명이 넘는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1년 반에 이르는 531일 간의 농성기간 동안 50회가 넘는 공연과 두 번의 ‘뉴타운컬쳐파티 51+’이 개최되었고 <파티 51>은 이 공연 현장의 열기와 두리반에서 활동한 음악가들이 펼치는 무대 위에서의 재치와 광기를 고스란히 2014년의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영화 <파티 51>은 두리반을 지키기 위한 경쾌한 저항의 기록을 감동적으로 기록했다(사진: 51+필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두리반의 저항은 이런 노력들로 인해 큰 성과를 거뒀다. 결국 두리반은 오랜 농성 끝에 비교적 합리적인 수준의 보상금을 받았으며 홍대 주변을 떠나지 않고 저항의 공간에서 칼국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재개발 농성장에 음악가들이 결합한 두리반은 무척이나 독특한 상황이었다. 만약 <파티 51>이 두리반을 통해 재개발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승리를 기념하는데 머물었다면 이 영화는 무척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한데 <파티 51>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파티51>은 생활 영역들을 재배치하고 변질시키는 자본주의의 도시학 속의 홍대, 즉 이제는 음악만으로 음악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홍대 앞과 마주한 음악가들의 삶과 두리반을 포개어 보여준다. 실제로 음악가들은 자신들과 두리반의 동질감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두리반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음악가 중 한 명인 한받은 “홍대 앞에서 밀려나는 음악가의 처지와 철거민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오랜 동안 인디음악의 창조적 활동의 장이었던 ‘홍대 앞’이라는 영역의 변질에 대한 증언이다. 실제로 두리반에 모인 음악가들은 두리반의 저항과정에서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들의 방식대로의 연대하고 분업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성장하게 된다. 급기야 이들은 변질된 홍대 앞이 음악가들에게 부여하고 있는 ‘인디’라는 수식어 보다 훨씬 급진적인 ‘자립음악가’로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자신들만의 조합을 만들어 낸다. <파티51>에는 이러한 과정들 역시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파티51>이 단순히 재개발 투쟁을 다루는 영상운동으로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두리반이라는 상황이 연결된 일종의 성장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끝으로 <파티 51>에 대해 반드시 알려져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지금은 보다 널리 시도되고 있는 '사회적 제작' 방식을 <파티 51>이 가장 최초로 실험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제작은 영화의 취지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개인 및 단체들이 소액후원을 통해 영화제작에 함께 참여하는 방식이다. 강정마을에 관한 다큐멘터리 <Jam Docu 강정>과 삼성 반도체 노동자 故 황유미 씨의 이야기를 극영화로 제작한 <또 하나의 약속>도 이와 비슷한 ‘제작두레’를 통해 제작되었다.


또한 <파티 51>은 영화의 저작권에 대해서도 차별적인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 개봉 후 3년 뒤(저작권법은 영상 저작물에 대해 공표 후 70년의 보호기간을 두고 있다)에 영리 및 수정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누구든 <파티 51>을 소장하고 공유할 수 있다. 일부 영화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극장에서 상영 종료되며 대중들과의 접촉면은 사라진 채 저작권을 통해 재산으로써 보호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 한다면 <파티 51>은 실효성 없는 저작권의 보호를 스스로 해체함으로 대중들과 접촉면을 넓히고 공익으로써의 영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실험들 역시 현 저작권 체제에 대한 경쾌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성국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간사



* 이 칼럼은 [오마이스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게재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