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안철수의 FTA 정책, 재고가 필요하다

opengirok 2012. 11. 20. 19:01

안철수의 FTA 정책, 재고가 필요하다

-15일치 ‘왜냐면-안철수 FTA 공약의 오해와 진실’을 읽고


안철수 후보 쪽의 자유무역협정(FTA) 정책이 보도되고 여기에 비판이 제기되자 김양희 대구대 교수가 ‘왜냐면’을 통해 에프티에이 정책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했다. 정책에 대해 이런 식으로라도 소통하려는 김 교수의 선의와 노력은 무척 긍정적이다.



사진: SBS 힐링캠프 안철수 편 中


지난 글에서 김 교수는 세 가지를 설명했다. 첫째, 안 후보 쪽은 “한-미 에프티에이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분명히 인식”하며 무조건 찬성하지는 않는다는 것, 둘째로 재협상과 개정(amendments)협상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대국민 설득 논리로서 안 후보 쪽에서 내세운 ‘에프티에이 선순환지수’를 통한 모니터링으로 현실화되는 문제 및 문제적 징후를 확인하여 이를 근거로 개정협상을 할 수 있다는 견해다. 이미 발효된 협정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도 신뢰받을” 절차와 근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그러나 김 교수의 이런 해명은 안 후보 쪽 에프티에이 정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우려를 조금도 해소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저 문제의 초점을 흐려놓았다.


먼저 김 교수는 한-미 에프티에이의 위험성을 인식하며 무조건 찬성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한-미 에프티에이의 위험성을 인식하는 것과 찬성·반대는 별개의 문제다. 말 그대로 위험성의 인식은 인식 차원의 문제이고 정책으로서 찬성과 반대는 실천의 문제다. 안 후보 쪽은 현행 한-미 에프티에이를 유지하는 것을 정책으로 택했다. 안 후보 쪽이 에프티에이 정책에 대한 재고가 없다면 김 교수의 해명은 사족이다.


다음으로 김 교수가 지적한 재협상과 개정협상의 개념에 관한 문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재협상도, 김 교수의 개정협상도 공히 개정이 전제된다. 다만 차이점은 재협상의 경우, 협상이 목적한 개정에 도달되지 않을 시에는 협정의 유보 및 폐기까지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고, 개정협상은 상대방의 개정 동의를 요구함에 개정협상이 실패하더라도 협정은 지속되게 되는 협정 틀 내의 조정도구이다. 따라서 협상이 곧장 개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오히려 김 교수에게 묻고 싶다. 한-미 에프티에이의 부작용들이 현실로 닥치거나 위험한 징후가 확인되었음에도 미국이 협정문 개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때도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신뢰받고자 한-미 에프티에이를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것이냐고.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에프티에이 선순환지수’를 개발해 한-미 에프티에이에 대한 모니터링으로 개정협상의 판단 근거로 삼겠다고 한다. 추측건대 에프티에이 선순환지수는 무역수지, 외국 직간접 투자 추이, 국내 생산, 고용 창출, 수입품 물가변동 등이 반영된 시기별 비교지수를 개발한다는 말인 듯하다. 한데 에프티에이 선순환지수의 정체가 아직 모호하고, 만약 이로 인해 정확한 모니터링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모니터링 자체가 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오히려 모니터링 데이터의 신뢰성을 위해 누적되는 시간과 최소 수개월에서 해를 넘기는 협상기간 동안 이미 문제를 바로잡을 시간을 놓쳐버릴 확률이 크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개정협상이 곧 개정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안 후보 쪽은 모니터링이 아닌, 문제 시에 정부가 쓸 수 있는 처방으로 무엇이 있는지, 독소조항들의 위험에서 국민과 국익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설득한 뒤에야 현행 한-미 에프티에이의 위험을 인식하고 있고, 무조건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안 후보 쪽이 현행 한-미 에프티에이의 위험을 인식하고도 찬성을 하는 것은 스스로도 밝히는바, 에프티에이를 통해 얻는 일부 실익과 국제사회의 신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2010년 한-미 에프티에이의 추가협상을 기억한다. 체결 뒤 3년이 지나 이루어진 사실상 재협상이다. 체결과 발효는 다른 단계이기는 하지만 김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체결 뒤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인 입김으로 시작된 재협상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신뢰가 한쪽에만 강요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신뢰라고 할 수 없다.


강성국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간사


*이 칼럼은 11월 20일자 한겨레 29면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