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시민운동, 시민을 대변하거나 대표하지 말아야

opengirok 2009. 2. 23. 15:07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난 후 얼마 지났을 때부터 ‘어떻게 하면 특정한 이슈를 먼저 선점할 수 있을까’에 신경쓰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언론에 얼마나 보도되는 지를 기준으로 일의 성과를 평가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단체의 다른 임원이나 활동가들 속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나중에 황주석 선생이 쓰신 책을 보니, 그 당시에 나는 ‘선점형 운동’에 빠져 있었다. ‘선점형 운동’은 단체간의 경쟁을 초래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조급증에 빠지게 하며 장기적 전망을 상실하게 한다. 노동운동에서 시작해서 생협운동, 시민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고 황주석 선생은 ‘선점형 운동’ 아닌 ‘성취형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취형 운동’이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냥 이뤄가는 운동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라는 사회변화를 ‘성취’하는 것이기에, 사실 모든 운동은 성취형 운동이 되어야 한다.


성취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느냐는 단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유형을 주창·옹호(Advocacy), 조직화(Organizing), 서비스전달(Service Delivery)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든 간에 꿈꾸는 것을 이뤄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3가지 분류 중에서 그동안 한국 시민운동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조직화(Organizing)라고 할 수 있다. ‘조직화’란 평범한 사람들, 특히 소외된 사람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내고, 사회적·정치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동안 시민운동은 지나치게 시민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활동해 왔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시민들 스스로 시민운동이 지향하는 좋은 가치들(예를 들면 평등, 생태, 평화, 인권, 풀뿌리민주주의 등)에 동의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다. 한국 시민운동은 이런 측면에 약했다. 한편 지금 필요한 조직화의 방향은 ‘이해관계에 기반한 조직화’가 아니라 ‘가치(비전)에 기반한 조직화’가 되어야 한다. 이해관계에 기반해서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방식은 이해관계가 소멸되면 곧바로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보다는 ‘좋은 사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시민들과 같이 고민하고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이제는 시민운동이 더 이상 시민들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려 하지 말자. 시민들을 대변하는 척 하면서 중립적 심판자를 자처하지도 말자. 누구도 시민운동에게 그런 역할을 위임한 적은 없다. 시민운동은 그냥 시민운동이 지향하는 가치를 표방하고, 그런 가치에 동의하는 시민들과 함께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가 조직되고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지·지원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시민단체들끼리 결성하는 각종 연대조직들에 대해서도 되돌아봐야 한다. 그런 연대가 과연 시민운동이 지향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연대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실무를 공유하는 연대’ 수준에서 연대조직을 만드는 것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각 단체가 활동하면서 섣불리 연대를 제안하고, 형식적인 연대조직을 꾸리는 것도 이제는 탈피해야 한다. 진정 연대를 하려면 ‘가치와 비전을 공유하는 연대’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활동가들끼리의 소통의 장, 공동교육 등이 훨씬 더 필요하게 될 것이다.


한편 ‘성취형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한 소극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운동이 바라는 사회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를 비판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치에서 희망을 만들어 내야 한다. 다만 시민운동이 정당을 만들거나 정치세력화를 하겠다는 식의 접근법에서는 탈피해야 한다. 그런 식의 접근법은 이미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개인들 한명 한명이 스스로 ‘적극적 유권자’가 되는 것이다. ‘적극적 유권자’는 정치를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좋은 정치인, 좋은 정치조직들이 만들어지고 성장하도록 실천하는 유권자이다. 서울에 있는 소위 ‘중앙시민단체’의 임원이나 활동가들부터 이런 ‘적극적 유권자’가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이들부터 자기가 사는 지역(동네)에서부터 정치적 실천을 조직하거나 그런 실천들에 참여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정치를 아래로부터 변화시키고, 시민운동이 지향하는 사회변화를 성취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본 컬럼은 시민사회신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