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관용과 불관용

opengirok 2011. 8. 11. 15:12
하승수 <변호사·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
 
얼마 전 채식을 선언하고 육류를 끊었다. 일단 시작은 했지만 확실하게 하려면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렸다. 그러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나도 채식을 한다”면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왜 이전에는 내 주위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채식을 해온 ‘채식 선배’들은 그동안 겪었던 여러 가지 고충을 털어놓았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왜 그렇게 사느냐”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든지, 별종이라는 시선을 받는다든지, “같이 먹을 것이 없어 불편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돌아보니 어쩌면 나도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그런 시선으로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시선 때문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구워 먹는 회식에 따라가서 묵묵히 채소와 밥만 먹기도 하고, 가끔 억지로 고기를 먹었다가 고생을 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채식뿐만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부족하다. 때로는 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을 가볍게 내뱉는 경우들이 많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자리에서 “몇 학번이냐”고 묻는다든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아이는 몇이냐”고 묻는다. 물론 특별한 악의가 있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는 아직도 금기시되고 있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자는 얘기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최소한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이런 얘기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작년 9월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성적 지향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 총장을 떠받드는 대한민국에서 유독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반 총장의 말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런 불관용의 문화는 청소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얼마 전 청소년들과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 만난 중3 여학생은 학교에서 ‘왕따’가 너무 심하다고 호소했다. 사소한 차이를 빌미로 특정 학생을 따돌리는 문화가 학생들 사이에 심각할 정도로 퍼져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왕따’를 쳐보면, 고통을 호소하는 학생들과 부모들의 글이 눈을 가득 채운다.

정치인들도 관용과는 반대되는 적대의 언어들을 사용한다. 얼마 전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제주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을 ‘종북’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 해군기지 부지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의견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분노한 주민들이 ‘종북’일 수 있을까? 왜 북한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도 남단에, 그것도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에 해군기지를 설치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주민들이 ‘종북’이라는 말은 어처구니가 없다. 나와는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 간단하게 매도당할 수 있는 불관용의 사회이기에 대한민국은 노르웨이의 테러범이 동경하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노르웨이의 테러범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참지 못한 것이다. 그 불관용이 적대를 낳았고, 그 적대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을 낳았다. 이런 비극을 막는 길은 관용의 정신을 더 넓게 퍼뜨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가 불관용과 적대를 부추기는 경우에는 불관용으로 맞설 필요도 있다. 존 로크가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다른 종교를 관용하지 않는 교리는 그 자신 역시 관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