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소비주의에서 시민권으로?

opengirok 2010. 11. 18. 11:10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이건희씨와 나는 평등한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야 당연히 불평등하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는?

이건희씨도 1표이고 나도 1표니까 평등하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이야기이다. 단지 1표를 가진 유권자인 시민이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의사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1표를 가진 이건희씨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돈이든 인맥이든)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표권은 1표씩이지만, 정치적으로 평등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


이런 얘기에 대해서 91세의 노 정치학자가 쓴 책이 있다. 미국의 로버트 달(Robert A. Dahl)이 쓴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On Political Equality)』라는 책이다.

로버트 달은 미국 정치학계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예일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책과 논문들을 썼고 미국 정치학회장을 지냈으며, 다원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라면 연구를 열심히 한 어느 학자의 이야기 정도로 생각이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yes24>


그런데 달의 놀라운 점은 미국의 정치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그 현실에 비추어 자신의 이론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성찰해 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달은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로 변했다. 돈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미국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가로 돌아선 것이다.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는 달이 미국정치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왔던 것들을 차곡차곡 담아낸 책이다. 이 책에서 달은 미국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걱정을 곳곳에서 표현한다. 인간과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누가 91살이 되어서까지 이렇게 진지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달에 따르면 미국의 정치적 불평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정치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불평등을 가져온다. 테러리즘의 위협에 대한 과장도 미국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달은 부시정권 하에서 시민적 자유가 약화된 것을 예로 들면서 ‘어쩌면 미국은 더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닐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하나는 나쁜 시나리오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시나리오이다.


나쁜 시나리오는 미국에서 정치적 불평등이 더욱 확대되고 민주주의 제도들이 심각하게 손상되며 민주주의라는 이상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좋은 시나리오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더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 행복이나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경쟁적 소비주의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미국 시민들 사이에서 더 많은 정치적 평등을 향한 움직임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소비주의에서 시민권 문화’로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1915년에 태어나 격동의 역사를 겪어 온 정치학자인 그가 마지막까지 미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면서 내린 결론이 시민권? 이라는 건 의외이다. 그렇지만 이해가 된다. 결국 정치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지금의 흐름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은 건강한 시민들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소비주의에 휩쓸리고 눈앞의 이익과 돈에 집착하는 시민이 아니라 공공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건강한 시민들 말이다. 그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미래를 지켜낼 희망이라는 것이 달의 결론이다. 70년간 고민하고 연구한 결론 치고는 아주 간명하다. 그리고 이건 미국만의 얘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얘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