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뿌레땅뿌르국처럼 돌아가는 대한민국 정부

opengirok 2010. 2. 22. 11:27


정부의 기록관리 규제개혁, 전문성 포기가 규제개혁인가?



개그프로그램인 ‘뿌레땅 뿌르국’에서나 나올 법한 병원을 상상해보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환자들의 생명을 살려야 하는 병원에서 어느 날 ‘규제개혁’을 하겠다고 병원장이 나섰다. 이에 그 ‘규제개혁’의 내용이 뭔가 하고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늘어나는 환자들을 위해 의사들을 더 채용하기는커녕 병원 경영의 효율을 위하여 간호사부터 직원까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한 학력제한이 ‘규제’이므로 간호사와 직원들이 간단한 교육과정만 마치면 의사가 될 수 있는 것이 ‘개혁’이란다. ‘나는 이 병원의 직원이자, 간호사이자, 의사요.’라는 병원에서 과연 환자들의 생명은 어찌될까?

사진 : KBS 개그콘서트 "뿌레땅 뿌르국"



문제는 이렇게 개그 소재로 삼을 만한 이야기들이 ‘선진화’를 꿈꾸는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벌어지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기록관리 전문요원 자격을 ‘기록관리학 석사’에서 ‘학사 학위 소지자’로 낮추고, 일반공무원도 간단한 교육과정을 마치면 자격이 가능하도록 완화하려는 국무총리실과 행정안전부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즉, 공공기관의 기록관리가 석사학위 이상의 전문성이 필요 없는 ‘규제’이므로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공공기록관리법)에서 기록관리 전문요원의 자격요건을 ’석사학위 소지자‘로 규정한 이유는 기록관리가 단순히 문서를 처리하는 행정업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적이고 중립적인 기록관리 전문요원을 통해 공공기관의 업무과정과 결과를 기록에 잘 표현되도록 하며, 이러한 기록을 국민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공기관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중요한 가치가 있는 기록을 선별하여 풍부한 역사자료를 남기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도 기록관리 전문요원의 자격을 ‘석사 학위’ 이상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전문가 집단인 의사들의 윤리강령인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아키비스트(기록관리 전문가) 윤리 강령’을 제정하여 실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에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 더욱 의심을 하게 하는 일련의 흐름들이 있다. 그것은 ‘보존연한 5년’ 이하의 기록물을 외부 전문가의 심의 없이 폐기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비공개 기록물’들의 공개여부를 5년마다 검토하는 절차를 삭제하려는 것이다. 보존연한 5년 이하의 기록물을 외부 전문가들이 심의함으로써 중요한 기록이 잘못 책정된 보존연한에 의하여 폐기되는 것을 방지하고, 비공개 기록물의 공개여부를 5년마다 검토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것이 현재 공공기록관리법의 목적이다. 이렇게 중요한 절차들을 ‘규제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삭제하려는 것은 기록물의 폐기를 쉽게 하여 정부행정의 증거들을 쉽게 폐기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겠다는 정부의 불순한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러한 ‘규제개혁’에 학계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절차도 밟지 않았다. 지난 10년 간 학계에서는 증대되는 기록관리의 중요성에 발맞추어  20여 개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설립하고 매년 수십 명의 기록관리 전문가를 배출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배출한 기록관리 전문가들은 ‘계약직’, ‘시간제 계약직’을 마다하지 않으며 공공기관의 전문적이고 중립적인 기록관리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지만,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개혁’은 이러한 학계의 열성적인 노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화성성역의궤 등 그 어느 나라보다도 우수한 기록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군사독재로 인하여 우수한 기록문화 전통이 단절되어 왔고 그나마 지난 10년 간 학계와 정부의 노력으로 다시 복원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선진화’의 과정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부의 ‘규제개혁’이 다시 기록관리의 암흑시대로 돌아가게 될까 심히 우려스럽다. 대한민국이 ‘뿌레땅 뿌르국’처럼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학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다시 재고하여 주길 바란다.

투명사회를위한 정보공개센터 문찬일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