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주4일제 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opengirok 2014. 7. 30. 16:59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진임



내가 일하는 단체는 한달에 한번 꼴로 '당직'을 서야 하는 날이 있다. 그것도 금요일에.

오지 않는 전화와 손님을 기다리며 텅 빈 사무실을 홀로 지키는 기분이란....(사실 밀린 일 하는데 이만큼 최적의 조건은 없다) 


사람들에게 '당직' 이야기를 하면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야근수당 따위는 못받을 게 분명한 시민단체에서 당직까지 서야 한다니....게다가 불금에!" 하지만 이내 그 눈빛은 측은함에서 부러움으로 바뀐다. 우리 단체의 당직 시간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거든. 



올해 초 부터 우리단체는 금요일 2시 퇴근제를 시작했다. 그래서 금요일이면 오후2시에 당직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퇴근한다. '충전'을 위해서.


활동가라는 직업이 퇴근시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퇴근 이후에 온전히 개인적인 생활을 하는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저녁시간을 회원과의 만남이나 회의 등으로 보내고, 주말에는 다음주에 할 일들을 생각하거나, 아니면 각종 행사와 프로그램 진행, 끊이지 않는 집회일정 등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할 시간은............ 또르르.........

쏟아내야 할 것은 많은데 채워지는 건 없어서 '새로운 발상' '대안' '창의성'은 어느새 사라지고 '해왔던 것' '안전빵' 위주로 일들을 기획하게 된다.

'다른 삶'을 이야기 하면서 정작 '다르지 않은 삶' 을 사는 게 활동가의 삶이다. 


그래서 결정했다. 금요일 2시 퇴근제. 

사실 2시에 퇴근을 한다고 해서 다른 삶이 짜잔 하고 열리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고작 4시간 일찍 퇴근하는 건데도 다른 삶에 대한 '여지'가 생긴다. 삶의 질도 확 높아진다. 


사람 드문 극장에서 예매 없이 영화를 보는 것, 목적지 없이 골목을 누비는 것, 한적한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 이것이 얼마나 많은 만족감을 주는지. 우리는 모두 안다. 한번쯤은 상상해본 시간, 동경하는 삶이었으니까. 

소박하지만 상상했던 삶을 실현한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대로 사용하는 잉여시간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생각했던 것 보다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 


금요일 오후 2시 퇴근제를 시행하면서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에 차질이 생기면 어쩌지? 활동가가 놀궁리만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나태해지면 어쩌지? 등등등.... 하지만 우려했던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일의 차질은 생기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퇴근 이후 야근(?!)을 해도 된다. 그리고 사실.... 반드시 금요일 오후에 해야 하는 일이 그렇게 많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업무시간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일을 해야 하는 시간까지 줄어드는 건 아니기 때문에 두시에 퇴근 한 다음에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 근처 카페에 앉아 일을 하는 웃픈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ㅠㅠ


또 남는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거나 공연이나 전시를 보는 등 문화생활을 하기도 하고, 교육을 듣기도 하면서 예전이었다면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활동에 접목시키는 일도 생겼다. 


나태는..... 사무실 밖에서 원하는대로 노는 것 보다, 사무실에 앉아서 오늘 저녁에는 뭘 하지? 뭘 먹지? 고민하며 맛집을 검색하거나, 페북 타임라인에서 댓글달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더 나태한 것 아닐까?





반년 정도 금요일 오후 2시 퇴근제를 시행한 결과 우리 단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만족해 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단체들에도 '너희도 이거 해라' 전도(를 빙자한 자랑)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좀 더 나아가 주4일 업무제를 실시하기 위한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일단 9월부터는 금요일 격주 업무제로 전환할 예정이다. 지금은 두시에 퇴근하고 돌아가서 당직을 섰다면 이제부터는 한달에 두 주는 아예 금요일에는 출근을 하지 않고, 출근할때는 10 to 6로 일을 하는 거다. 이렇게 금요일 업무 스케쥴을 조정해 가면서 내년부터는 금요일에는 아예 출근을 하지 않고 알아서 시간을 사용하는 것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사실 활동가의 업무라는 게 출퇴근이 명확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사무실에 출근해야만 되는 일인것도 아니고, 공과 사의 업무 구분이 똑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들.. 동의 하시죠?)


그런데 우리는 왜 기성의 주5일 업무, 9시 출근- 6시 퇴근, 잔업과 야근을 떨치지 못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걸 고수하고 있는 걸까? 


일하다 죽을것도 아닌데 자유롭게 사용하는 시간을 좀 가져도 되지 않을까?

노동시간 단축해야 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노동시간이 단축된 삶을 살아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낮에 퇴근해도, 일주일에 4일만 출근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체도 별탈 없고, 활동도 별탈 없다. 더 나아졌으면 나아졌지,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해 보니까 그렇다. 



업무시간 단축. 겁내지 말고 해봤으면 좋겠다. 시민단체들이 먼저 해봤으면 좋겠다.

딱 까놓고 말해서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다. 충전도 일인데.. 충전은 없이 너무 일만 하고 있다. 


노동강도 높은 기업들 비판만 하지 말고, 업무 환경 좋다는 제니퍼소프트 같은 회사 부러워만 하지 말고, 우리가 해보자. 우리는 다른 삶을 이야기 하는 시민단체들 아닌가. 


후회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한다. 


* 이 글은 시민운동 플랜B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