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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문제제기 틀어막는 산업기술보호법, 국회의 반성을 촉구합니다.

opengirok 2019. 11. 20. 17:08

오늘 오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과 노동자들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악을 규탄하기 위한 시민사회단체들의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지난 십수년 간 삼성 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 문제를 제기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주최로 이루어진 오늘 기자회견에 정보공개센터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11월 20일, 국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문제의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은 이미 지난 8월 20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안입니다.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에서 그동안 국회에서 발의된 여러 산업기술보호법을 통합하여 7월 31일에 개정안을 내놓았고, 별다른 논의나 문제 제기 없이 20일만에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되었습니다. 당시 재석 중이던 210명의 국회의원들 중, 기권한 4인을 제외한 206인의 국회의원들이 정당을 가리지 않고 모두 법안에 찬성했습니다. 일본과의 무역 마찰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의 산업기술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에 모두 동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의 산업기술보호법 전문 확인하기


그런데, 이 법안은 사실 아주 큰 문제가 있는 법안입니다. 개정된 내용을 잘 살펴보면, 이 법안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외국인이 국가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인수하기 어렵도록 규제한다.


2) 반올림과 같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기업의 유해한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도,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할 수 없도록 한다.



당연히, 두번째 목적이 큰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법안이 왜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을 제약하는지, 찬찬히 풀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 개정안은 '국가핵심기술의 정보 비공개'라는 조항을 두어, 공공기관이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국가의 안전보장 및 국민경제의 발전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없는 경우"에는 공개하도록 하고 있으며, 이 때는 기업의 의사를 듣고,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의 동의를 받은 후, 또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공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부터가 정보공개법의 취지나 절차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국가핵심기술의 정보 비공개 조항 신설




 정보공개법에서는 분명, 공공기관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관리하는 정보들을 적극적으로 공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정보는 공개 대상이며, 예외적으로 비공개 대상 정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산업기술보호법이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되, 복잡한 절차를 거쳐 공개하겠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쉽게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아니, 국가핵심기술이라면 당연히 비공개해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 국가핵심기술이라는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삼성과 고용노동부는 그동안 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들의 작업환경측정보고서 정보공개 청구에 대해, '국가핵심기술 유출'이라는 핑계로 비공개를 일삼아 왔습니다. "공개가 원칙이되, 예외적으로 비공개"였던 지금까지도 공장의 유해물질 사용에 대한 정보를 내놓지 않았는데, "비공개가 원칙이고 예외적으로 공개"로 변한 상황에서는 이제 더욱 더 정보공개를 받기가 어려워진 셈입니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조항으로 인해 정보공개법이 완전히 무력화 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삼성과 고용노동부는 정보공개법 제9조제1항제7호를 근거로 작업환경측정보고서는 비공개 대상 정보라고 주장했습니다. '7호'는 바로 "경영상ㆍ영업상 비밀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법인등의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를 의미합니다. 반도체공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들이 밝혀질 경우, 반도체 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이 삼성과 고용노동부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7호'에는 "사업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위해로부터 사람의 생명, 신체,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할 필요가 있는 정보"는 공개 대상이라는 단서조항이 붙어있기 때문에, 그동안 반올림은 정보공개소송을 통해 산업재해 인정을 위한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보 비공개 근거로 정보공개법 제9조제1항제1호, "다른 법률에 따라 비밀이나 비공개 사항으로 규정된 정보"를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업기술보호법에서 비공개 정보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정보공개를 거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반올림은 정보공개법을 무기로 "사람의 생명, 신체,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주장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삼성 쪽에서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라 "정보공개를 할 경우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을 깨기 매우 어렵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법 개정으로 인해 작업장 환경에 대한 정보공개 받기도 어려워졌지만, 설령 천신만고 끝에 정보공개가 되더라도, 그 정보를 활용해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내는 시민사회단체의 기본적인 활동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산업기술보호법 제34조에 따르는 '비밀유지의무' 때문입니다.


정보공개 청구로 확보한 자료는 '대국민공개'가 원칙인데, 산업기술보호법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깨버렸습니다.



 기존 법안에서는 기업의 임직원, 연구원, 산업기술과 관련한 업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비밀유지 의무'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보공개 청구나 산업기술 관련 소송 업무를 통해 산업기술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된 사람들도 '비밀유지의무'를 지게 됩니다. 만약 이 규정을 위반하여 비밀을 누설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됩니다.



 산업기술보호법 제14조 8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기술 관련 소송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적법한 경로를 통해 산업기술이 포함된 정보를 제공받은 자가 정보를 제공받은 목적 외의 다른 용도로 정보를 사용하거나 공개하는 행위"를 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됩니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이 '산업기술에 관한 정보'라는게 굉장히 추상적인 규정이라는 점입니다.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반도체 공장의 위험성에 대해 정보를 알게 되더라도, 이걸 언론에 알리는 순간 '비밀유지의무' 위반으로 고발 당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산업재해 피해자들이 산업재해 입증을 위해 작업장 환경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를 하여 자료를 받더라도, '산업재해 입증'에만 자료를 써야지, 이 자료를 바탕으로 공장의 위험성을 사회적인 이슈로 제기하는 순간 처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이것이 '국가핵심기술'이냐, '비밀'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일단 고발 당하는 순간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반올림과 다른 시민사회단체들이 산업재해 입증을 위해 펼쳐 왔던 수많은 활동들이,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으로 인해 한순간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 법안은 아주 꼼꼼하게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을 억누르고 있는데, 심지어 앞서 말했던 제14조를 위반할 경우, 손해로 인정되는 금액의 최대 3배 금액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정작 산업재해의 책임을 져야 할 기업들에게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책임이 없는데, 산업재해의 문제를 제기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해야할지도 모를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산업기술보호법은 내가, 내 가족이, 내 친구가 일하고 있거나 앞으로 일할 수 있는 공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면서도 말할 수 없도록 재갈을 물리고, 협박하는 법입니다. 시민들이 안전하게 일하기 위해 당연하게 알아야 하는 정보들이, 이제 '산업기술보호'라는 미명 아래 은폐될 예정입니다.


 이렇게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의 내용을 따져보면 무엇보다도 '반올림'의 활동을 막기 위한, 삼성을 위한 법안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반올림이 작업환경측정보고서에 대한 정보공개 소송에서 승소하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해당 사례를 들어 '산업기술보호'를 위해 정보공개법 비공개 조항을 새롭게 만들고자 했던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원유철 의원 발의안 / 김정재 의원 발의안 )정보공개법 개정을 통한 '반올림 저격'이 실패하자,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으로 방향을 틀어 순식간에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제안이유에서부터 '반올림 저격'이 의심되던 자유한국당 원유철 의원의 정보공개법 개정안




20대 국회에서 지난 4년 간 시민의 알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발의된 정보공개법 개정안은 열 다섯건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산업기술보호'를 위해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발의한 두 건의 정보공개법 개정안은 제외합니다.) 열다섯건의 개정안 중에서는 지난 10년간 정보공개센터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내용들이 많이 반영된 법안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민의 알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정보공개법 법안들은 모두 상임위에 계류 중입니다. 국회에서 발의만 되고, 회의록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시민의 알 권리 확대에는 무심한 국회의원들이, 시민의 알 권리를 제약하고,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크게 해칠 수 있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은 일사천리로 이뤄냈습니다. 삼성을 위해 알 권리를 제한하는 법은 한 달 만에 전원 찬성으로 통과되고, 시민을 위해 알 권리를 확장하는 법은 통과될 소식 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너무나 조용히, 소리 없이 통과된 산업기술보호법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만약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찬성했다면 지금이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산업기술보호법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 지금이라도 소리를 높여 지적하고, 이를 되돌릴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길 바랍니다. 국회가 시민과 노동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일하는 곳인지, 아니면 삼성의 산업재해 책임 회피를 위해 일하는 곳인지, 국회의원들이 행동과 실천을 통해 증명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