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신영철, 보수언론, 그리고 법률가의 길

opengirok 2009. 5. 27. 17:34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하승수 변호사, 제주대 법대 교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충격적인 소식에 온 국민이 슬픔과 안타까움에 잠겨 있다. 그러나 5월 29일로 예정된 영결식이 지나면 할 일을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몫일 것이다. 특히 신영철 대법관 문제가 자칫 추모열기와 함께 사그라져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한겨레 3월 6일자



신영철 대법관은 엘리뜨 판사다.
같은 법률가라도 잡초처럼 살아온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정해진 엘리뜨코스를 밟아온 사람도 있다. 신영철 대법관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대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그의 프로필을 찾을 수 있다.

"신영철 대법관은 1953년 말경 충남 공주의 작은 농촌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81년 9월 법관으로 임관되어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서울민사지방법원, (…) 대법원장 비서실장,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 수원지방법원장, 서울중앙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하다가 2009년 2월 18일 대법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프로필이 보여주는 것처럼, 신영철 대법관은 판사로서는 최고의 엘리뜨코스를 밟아왔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동기들 중에서도 선두자리를 유지하다 대법관에까지 올랐다.

물론 엘리뜨코스를 밟은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아마도 이번 재판개입 파문이 없었다면, 그는 그동안 무수히 배출되었던 엘리뜨코스를 밟은 대법관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런 화려한 경력의 대법관이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요구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런 경력의, 또는 이런 성향의 대법관이 물러나야 한다고 여긴 적은 없다. 아무리 불만스러운 대법원 판결이 나와도 그 판결을 비판했지 판결을 내린 대법관더러 물러나라고 한 적은 없다.


사퇴를 요구하는 진정한 이유

그런데 이번만큼은 다르다. 나는 신영철 대법관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대법관으로서 아주 말도 안되는 판결을 했다고 치자. 나는 그것 때문에 물러나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런 사람이 대법관으로 임명되는 씨스템을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임명된 대법관을 판결내용 때문에 물러나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일 때문에 물러나라고 하는 것이라면 지금 보수언론이 주장하듯 '사법독립'의 침해라고 간주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신영철 대법관은 대법관으로서 내린 판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법관의 재판에 부당하게 관여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재판을 몰고 가려고 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사퇴요구는 '사법독립'을 전혀 침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법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법원장이 법관의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할 수 있다면 그 즉시 '사법독립'은 사망한다. '사법독립'을 죽이려 한 사람이 대법관이라면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영철 대법관이 대법관으로서 내린 판결 때문에 비판받고 있다면, 나는 그에게 물러나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 물러나라고 말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보수언론은 논점을 흐리지 말라

그런데 보수언론은 문제를 계속 왜곡하고 있다. 판사들이 판사회의를 여는 것을 가지고 '집단행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집단의 구성원이 모여서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게 무슨 집단행동이고 하극상인가?

사실 어떤 기준을 갖다 대더라도 판사들은 한 사회에서 보수적인 집단이기 마련이다. 판사 개인이 가진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보수적이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판사들이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에 대해 분노할 정도라면, 그만큼 그 개입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처럼 심각한 사법독립 침해에 판사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지금 판사들의 목소리는 매우 자제된 듯하다.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완곡한 어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판사들의 고심을 이해하기보다 집단주의로 매도하는 보수언론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지? 모르겠다. 보수언론이 그들 말대로 '보수(保守)'이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누구보다 먼저 신영철 대법관에게 사퇴를 요구해야 한다. 법치주의와 사법독립을 부정하는 보수나 자유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는가? 권력의 편의대로 재판결과가 좌우되는 사회가 보수언론이 만들고 싶은 사회인가? 그렇지 않다면 보수언론부터 신영철 대법관의 사퇴를 요구해야 한다.

동아일보 3월 21일자 사설



평판사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한편 사퇴요구가 법관의 신분보장에 반하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거꾸로 보면 신분보장 제도를 존중하기 때문에 사퇴요구를 하는 것이다. 사퇴요구를 해도 본인이 사퇴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나 사퇴하는 것이 마땅한 사람에게 사퇴하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사퇴요구는 하나의 표현행위이고, 의사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고, 어떤 이유로든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파시즘이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평판사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그리고 내부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외부를 향해 비판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어려운 일이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평판사들의 용기 덕분에 '사법독립'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 안타까움도 있다. 이런 일이 아예 없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다. 어느 개인을 비판하고 물러나라고 하는 일은 모두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신영철 대법관의 결단을 기대한다. 마지못해 떠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사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게 많은 판사들이 선배법관에게 기대하는 모습일 것이다.


법률가의 길은 외로운 길

지금까지 많은 법률가들이 명멸을 거듭해왔다. 대법원장이 된 사람도 있고, 명예의 문턱에서 명예롭지 못하게 물러난 사람도 있다. 정치의 길로 들어서서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낙선의 고배로 좌절한 사람도 있다. 처음부터 엘리뜨코스만 밟다 지는 사람도 있고, 비탈길을 자청해서 걷다 지는 사람도 있다. 어떤 길을 걷든 그 길은 외로운 것이다. 한순간의 실수나 잘못이 용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실수나 잘못을 변명하기보다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주말 아침에 들려온 소식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