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대한민국 역사 앞에 칼날을 드리우는 자 누구인가

opengirok 2010. 1. 28. 10:58


 

헌법상 보장되어 있는 국민알권리의 기본이자, 국가운영의 책임성을 담보할 수 있는 기록관리가 무너질 위험에 처했다. 참여정부 때부터 어렵사리 시작된 기록관리 혁신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공공업무 과정의 철저한 기록화와 체계적인 기록관리로 업무의 효율성을 높일 뿐 아니라 국민으로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것이 이 혁신의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공공기관에 기록관리 전문가인 기록관리전문요원(이하 전문요원)이 배치되었고, 제도와 함께 기록관리 프로세스가 재정비 되었다.

하지만 최근 정부의 움직임은 그동안 진행되어왔던 혁신내용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지난 2009년 12월 22일과 1월 6일, 행정안전부는 기록관리 프로세스 현실화 ▴전문요원 자격요건 완화 및 배치 유예를 주제로 ‘행정내부규제개선 회의’를 열었다. 국무총리실에서도 불과 며칠 전 ‘선진화 과제 발굴회의’로 기록관리 전문요원의 자격기준완화 및 지자체 배치 시기 연기에 대해 논의를 진행했다. 기록물 폐기 및 비공개 기록물의 공개재분류 등 기록관리 절차를 간소화하고, 기록물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현재 전문 교육과정을 이수한 석사이상으로 되어있는 전문요원의 자격요건을 완화하자는 내용이 회의의 주된 골자다.

하지만 정부의 '선진화'와 '규제개선'을 앞세운 이 논의의 실상은 기록관리 후진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게 자명하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대한민국의 기록이 “관리” 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수준 높은 기록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등을 남겨준 선조들의 이야기일 뿐. 그에 비하면 대한민국의 기록문화 수준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2005년 공공기관에 전문요원이 배치되고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관한 법률’(이하 기록물관리법)이 개정되기 전의 상황을 보면 국가기록의 최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기록은 그 이름과 권위가 무색하게도 남겨져있는 기록물건수가 단출하기 그지없으며, 공공기관의 기록도 곰팡이가 슬고 찢어지는 등 창고 같은 서고에서 방치되어있었던 것이다.

과거 모 중앙부처의 문서고. 기록물과 비품이 함께 어지럽게 널려있다


하지만, 참여정부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기록의 생산부터 폐기되기까지 체계적으로 관리될 수 있는 기록관리 프로세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록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생기니, 기록의 양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과거 생산하고도 등록하지 않아 은폐되었던 기록들이 수면위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록을 통한 투명한 행정으로 신뢰 있는 국가를 만들자는 정부의 자기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민주주의를 향한 행보는 오래가지 않았다. 참여정부에서 추진하고 일궈놓은 기록관리 문화가 난도질당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이후 <대통령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으로 청와대와 봉하마을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현 정부의 전자기록에 대한 무지로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MB정부로부터 대통령기록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하는 사태까지 갔다.


뿐만 아니다. 지난해 공직자들이 부당 수령한 쌀 직불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치권은 대통령지정기록물로 지정되어있던 관련기록을 끝내 열어버리고 말았다. 대통령기록이 남겨질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장치인 대통령 지정기록물제도를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몇 차례에 걸쳐 난도질당한 기록관리가 이번에 또다시 칼날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번 칼날의 타깃은 바로 기록관리의 주체인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이다.

현재 전문요원은 기록물관리법에 의해 기록관리학 석사학위 이상을 취득한 자 이거나 역사학, 문헌정보학 석사학위 이상을 취득한 자로서 행정안전부 장관이 정하는 기록물관리학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만이 그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있다. 기록물의 생산, 분류, 이관, 수집, 평가, 폐기, 공개, 활용 등 기록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 전문요원의 자격요건을 학사학위로 하향조정하겠다고 한다. 기록을 관리하는 데에는 실무경험이 중요한 것이지, 특별히 전문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록관리 현상만 바라본 채, 본질은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발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학위와 학벌만으로 자격을 가르자는 것이 아니다. 전문요원의 밥그릇 지키기를 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기록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교육이 반드시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문요원이 행정직이 아닌, 연구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키비스트(Archivist)라고 불리는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의 본질은 기관 업무 및 기능을 조직하는 코디네이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내용’을 책임지는 것이 아닌,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 즉 조직의 의사결정 및 활동과정 상의 ‘맥락’을 복원시키고 진본성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이 전문요원의 본원적 임무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키비스트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학원과정에서의 연구와 교육,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국제 기록관리 흐름을 선도한다고 할 수 있는 북미에서도 기록관리학을 대학원 과정에서 개설해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 아키비스트협회인 SAA(The Society of American Archivist)는 기록관리학 대학원 과정에서 전문성 확보를 위해 필수적으로 다뤄야 하는 전공과목을 지정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의 기록관리 전공 커리큘럼



정부의 전문요원 자격완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배치되어야 하는 전문요원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격을 완화해 공급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기록이 제대로 관리되든 말든 사람부터 채우고 보자는 막가파식 발상이다. 마지막 이유는 수험생들의 과도한 비용부담 때문이라고 한다. 대학원을 졸업하려면 학비로 3000만원이 들어가는데, 이를 막자는 것이다. 반박할 필요조차 느끼지못할만큼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유다. 정부는 기록관리학 대학원 자체를 공무원 양성 학원쯤으로밖에 생각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정부가 기록관리를 바라보는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예라고 할수 있다.

실제로 행정안전부는 공공기관의 기록관리를 관장해야하는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기록관리를 ‘행정내부규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국무총리실이 ‘선진화 발굴과제’라며 내놓은 사안들은 또 어떤가. 정부의 논의가 그대로 시행된다면 국민의 알권리가 무너지고, 그와 함께 공공기관의 투명성과 책임성도 파탄 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기록관리 실무를 책임지는 국가기록원마저도 이런 사태를 관망한 채 정권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는데 정신이 없다. 또한 전문요원의 배치를 유예 해달라는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의 요구는 스스로 행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이 부족하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올바른 공공기록의 관리는 공적 행위의 설명책임을 지는 정부의 주요 의무이자, 효과적으로 행정을 통제하여 투명행정과 책임행정을 실현시키는 수단이다. 하지만 현재 행정안전부와 국무총리실에서 주도하고 있는 기록물관리법 개정 움직임과 기록물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국가기록원의 수수방관 태도는 학계와 시민사회 어느 누구의 동의도 받지 못하는 모습이다. 정부는 기록민주주의가 이대로 퇴보해버린다면, 앞으로 기록될 대한민국의 역사 역시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훼손된 역사 앞에 결코 떳떳해 질 수 없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진임 간사